all walls are great if the roof doesn't fall
독후감을 쓰는 것이 줄거리를 쓰는 것이 아니듯이.
여행기를 쓰는 것이 일정을 설명하고 사진을 올리는 것이 아닐텐데.
여행을 다녀오면 하는 짓은 그저 줄거리를 쓰는 것뿐이다.

나흘 동안의 북경 여행.
첫날은 황사가 끔찍했다. 천안문 광장을 지나 자금성으로 들어가는데
숨을 쉬는 건지 모래를 마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황사는 다음날 서울로 들이닥쳐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그리고 역사박물관의 조합은
붉은 광장과 크렘린궁, 그리고 역사박물관을 연상케했다.
규모가 다르고 색채가 다르고 용도가 다르지만
각각의 상징과 조합은 아주 흡사한 느낌이었다.

둘째날은 만리장성에 갔다.
다른 부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
도대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 그것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둠 속의 댄서> 삽입곡 'I've seen it all'의 가사가 떠올랐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 '너 이것도 보고싶지 않아. 저건 어때?'하고 묻는 가사 중
'What about China? Have you seen the Great wall?'하고 물으니
셀마가 대답한다. 'All walls are great if the roof doesn't fall'.
주차장에서 만리장성을 오가는 케이블카는 온통 한글낙서로 범벅이 돼있었다.

셋째날은 동인당 약국에 갔다.
중국에서 나는 자연 재료로만 약을 재조해 판매하는 유명한 약국이라고 했다.
진맥만으로 몸의 상태를 너무 잘 맞춰 서커스를 보는 느낌이었다.
수십년 동안 어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나의 오랜 병에 대해
완벽하게 새로운 진단을 내주는 통에 약을 지어왔다.
먹고 나으면 만세이고, 아니라 해도 어차피 먹는 약,
이 약에 돈을 쓰나 저 약에 돈을 쓰나 매한가지이니 아까울 건 없다.

셋째날 저녁에는 해당화라는 이름의 북한 식당에 갔다.
'북경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대 식당'에 드는 곳이라고 메뉴판에 써있었다.
육회와 송이구이, 소라신선로를 먹었는데 송이의 향과 맛은 참 감격스러웠다.
금강산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송이버섯은 양양이나 봉화에서 먹던 것과는 아주 다른 맛이었다.
평양냉면과 김치 역시 신기하고 맛있었다.
김치는 무채가 없이 배추와 고추가루, 마늘, 젓갈 같은 양념으로만 돼있었다.
무채가 없이 김치 맛을 내는 것에 대해 남편씨와 한참 설전을 벌였으나
뭐 결론은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김치 담을 것도 아니어서.
북한산 포장김치를 사오는 것으로 끝을 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도 북한식당을 많이 다녔는데,
그때보다 메뉴도 많이 개발됐고, 서비스도 좋아졌고, 언니들도 예뻐졌다.

마지막날은 비행기 안에서 사이먼 앤 가펑글의 <올드 프렌즈 라이브>를 들었다.
'Homeward Bound'를 듣다보니 어느새 집에 와있었다.

물론 이게 여행의 전부는 아니었다.
중국 어르신들의 파고다공원인 천단에도 가고 서태후의 여름별장이라는 이화원에도 가고
중국 서커스도 보고,
라텍스 상점에도 가고, 옥공장에도 가고, 찻집에도 가고, 명주솜가게에도 가고
짝퉁가게들에도 갔다.

나흘 동안의 북경 여행.
그냥. 기억하기 위해 메모로 남긴다.
by 얼음 | 2009/03/20 04:22 | 얼어붙은 손가락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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