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유투 공연 후기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기내지에서 베른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E=mc2" 공식을 완성한 1905년(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렵 베른에 살았더랬는데.
베른 시에서 아인슈타인의 흔적이 남은 88가지 장소를 투어 코스로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아니, 도대체, 누가 실체조차 없는 공식을 완성한 '장소' 따위에 가고 싶을 거란 말야?
거기서 무슨 감동을 느낄 거라고."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어머, 여기가 아인슈타인이 산책한 장소야,
아, 아인슈타인이 이옷을 입고 이 책상에 앉아 그 유명한 공식을 연구했단 말이지."
하면서 감동.감격.숙연. 이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제가 'E=mc2'이 인류의 역사에, 제 인생에, 우주의 본질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유투 공연에 다녀와서 난데없는 아인슈타인 타령을 하는 것은
유투를 실물로 접하고 난 후 제가 느끼는 이 '허무한 마음'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나는 특별한 유투팬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정색하고 한단어 한단어 머리 속으로 되뇌인 건 아니지만 늘 그런 기분이었죠.
저보다 유투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더 많이 아는 사람도 많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특별한 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 보시는 분들 중 그런 생각 안 해보신 분, 손 들어보세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그날의 공연에 대해 기억나는 순간도, 특기할 만한 느낌도, 대단한 감동도 없습니다.
세트리스트대로 다시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공연 중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눈물이 줄줄 흐르지도 않았고 감동해서 붕 뜬 것 같은 순간도 없었고
손가락 끝이 저릿하지도. 눈앞이 어질하지도. 마음이 철렁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공연중 했던 '생각'은 몇가지 기억이 납니다.
"왜 이렇게 어느 노랜지 모르겠지?"
정말 그랬습니다. 다 아는 노랜데. 가사도 다 따라하겠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랜지 모르겠는겁니다.
심지어는 제가 제일 좋아한다는 'Bad'- 까페 가입할 때, 가장 좋아하는 노래 쓰는 란.
제가 거기 써넣은 노래가 'Bad'입니다-를 부르는데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Bad'인 줄 알았습니다.
"두번째 생각은 보노 이빨 빠지려면 한참 멀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유투팬을 놀리느라고-그는 이번 공연에 못 갔습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유투는, 보노 이빨 다 빠지거나, 아니면 남북 통일 해야 와요.
근데. 이빨 빠지만 Streets 부르면서 달리지도 못할 텐데. 그때 봐서 뭐해요?
지금 가야되요. 다음 앨범 내면 보노 이빨 다 빠질 지도 몰라요."
그런데. 보노. 아직 젊더군요. 10년 내에는 이빨 안 빠질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동경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도 그랬습니다.
감정상태가 불안정해서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흥분' '감동' '고양'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허무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83~84년 부터 유투를 들었습니다.
라디오로, 카세트 테이프로, LP로, CD로, mp3로, 불법 카피 VHS 로, DVD로 유투를 들어왔죠.
그렇게 20년 동안을 키워온 환상의 실체를 보았으니 허무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다행히 그 환상을 깨뜨릴만큼 가까이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환상은 내가 그려왔던 것만큼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오래동안 버려두고 있는 사이트 유투스프레이에 접속해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3~4년 전에 제가 썼던 글들. 낯뜨거운 것도 있고 여전히 공명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제가 정말 '나는 특별한 유투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에는 강세가 '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서 특별한 유투팬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유투 음악과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나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는 그렇게 하나하나 모두가 특별한 유투팬이 수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저를 포함해서) 유투(그들이 표방하는 이면을 포함한)를 지탱해주는 힘이죠.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초반부 사람들에게 밀리고. 밟히고. 치일 때는 내가 일본까지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화가 났는데,
돌아보니 네가 너무 즐거워하면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거야. 그래서 마음이 풀어졌지.
다음에 또 기회 있으면 가자구. 근데. 하나는 약속해야 돼. 절대 앞쪽에 가겠다고 고집 부리면 안 돼."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즐겁게 공연을 보긴 했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걸 보면
혹시 이게 제가 'E=mc2과 베른에서는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한
진품의 아우라. 현장의 압도감 같은 것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을 기다린 공연을 보고났는데. 아무런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퇴근길. 막히는 올림픽대로에서. 아케이드 파이어의 'Wake Up'을 들었습니다.
('Wake Up'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자명종 같은 노래였습니다.)
갑자기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무대 앞 풍경이 확 살아 일어났습니다.
'Wake Up'이 시작되자 갑자기 확 밀리던 관중들. 내앞에 있던 남자의 머리냄새.
뒷쪽 외국 남자가 '보노'하고 부르던 외침.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미친 듯이 내닫던 느낌.
그리고는 유투 공연이 모두 기억났느냐구요?  물론. 아닙니다. 그냥 그게 끝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모든 기억이 소환되는 것. 그건 영화나 드라마에나 있는 일인 모양입니다.


@@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며. 늘 숙제 같았던 후기를 정리했습니다.
사실 1년 반 전에 쓴 글에서 고친 건 거의 없습니다. 접속사 몇 개. 조사 몇 개 정도.
그때 그냥 올렸어도 됐는데. 이제와 소용 없는 후회를 했습니다.
by 얼음 | 2008/08/13 10:54 | 유투.보노에지아담래리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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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ike at 2008/09/06 12:10
유투콘서트가 갔다온지 한 10년은 흐른것 같아요..
Commented by 얼음 at 2008/09/07 06:20
저두요. 새 앨범 내고 월드 투어하면. 적어도 일본은 오겠죠? 그땐 범국민적(!)으로함께 가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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